대한문 (大漢門 )
현재의 덕수궁의 정문은 대한문 ( 大漢門 )이다. 그러나 원래의 대한문은 大漢門 이 아니라 대안문 ( 大安門 )이었다. 그 후 1906년에 고종황제가 대한문으로 명칭이 바꾼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그리고 한양의 궁궐은 모두 불에 타버리고 만다. 1593년 한양에 돌아온 선조는 거처할 궁궐조차 없었다. 이에 선조는 월산대군 ( 선조의 형 )의 집을 임시거처로 사용하게 된다. 이곳이 경운궁인 것이다. 원래 덕수궁의 이름은 경운궁 ( 慶運宮 )이고 이는 광해군 때에 정해진 명칭이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부터 강제 퇴위된 고종황제를 태황제라 명명했는데 덕과 장수를 뜻하는 덕수궁 ( 德壽宮 ) 즉 태황제의 거처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덕수궁이 되었다.
덕수궁의 정문은 대한문 ( 大漢門 ) 원래는 대안문 ( 大安門 )이고, 덕수궁의 동쪽문을 대안문이라 했다.
경복궁의 정문은 광화문 ( 光化門 ).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 ( 敦化門 ).
창경궁의 정문은 홍화문 ( 弘化門 ).
경희궁의 정문은 흥화문 (興化門 ) 이다.
그러나 덕수궁의 정문은 따로 있었다. 지금은 돌로 쌓여 있지만, 서울시립미술관 맞은편에 정문이 따로 있었는데 인화문 ( 仁化門 )이라고 했었다. 덕수궁 돌담길의 어딘가로 추정되지만 모두 `화`자 돌림으로 장식을 한다. 덕수궁의 정문은 바로 `인화문` 인 것이다.
당시 러시아 공사관이 위에 있고 『아관파천 (고종이 일본의 위협을 피해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을 이른다)』 이후 일 년이 지나 환궁을 하면서 인화문을 통해서 들어갔다는 기록이 [승정원일기 광무 1년 1월 19일] 있다.
석어당 ( 昔御當 )
석어당은 1593년 이후 선조가 머물렀던 전각이다. 1904년 불이 나서 그 이후 중건을 했다. 석어당과 즉조당 ( 卽阼堂 )은 가장 오래된 궁궐로 선조가 피난 이후 갈 곳이 없어 머물렀던 곳이 석어당이다.
즉조당 ( 卽阼堂 )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를 했던 곳으로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으로 인조 즉위 이후 창덕궁으로 옮겨 가면서 경운궁의 대부분을 돌려주었다. 즉조당의 편액은 고종의 글씨이다.
편액은 건물의 이름을 써서 문위에 거는 것을 말하며, 현판은 편액과 주련을 합쳐서 부르는 말인데 여기서 주련이라 함은 기둥 주 (柱), 이을 련 (聯)으로 좋은 글귀를 써서 편액에 걸린 건물의 기둥에 붙이는 것을 주련이라 하며 현판은 편액에 주련을 합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서궁유폐 (1618)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서궁 ( 경운궁 )에 유폐시킨 사건이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서쪽에 있다고 해 서궁으로 불리는데 인목대비가 10년 이상을 유폐된 곳이다.
중화전 ( 中和殿 )
중화문을 지나면 덕수궁의 정전 중화전 ( 中和殿 )이 나온다. 중화전은 1902년 건립된 대한제국의 법궁이다. 중화전은 대한제국 선포 5년 후 완공 되었으며, 다른 궁궐에는 볼 수 없는 황제국의 표식들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어좌가 있고 어좌 뒤에 일월오봉도가 펼쳐져 있다. 천정에는 중앙에 황룡이 조각되어 있고, 이는 황제의 권위와 존엄을 상징하며 황금색 현판, 황금색 문살등 황제국의 표식이 눈에 띈다.
답도
답도는 궁궐에서 임금이 가마를 타고 지나가는 계단을 이르는데, 황제를 상징하는 쌍용이 조각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궁궐에는 봉황문양이었다고 한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제를 상징하는 용 문양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드므
화재 시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담아 두었던 아주 넓적한 독이다. 드므는 순우리말로 조선시대에는 사용하지 못했던 만세 ( 萬歲 )가 새겨져 있는데 황제의 만수무강을 비는 뜻으로 만세를 외쳤다.
박석
궁궐의 바닥은 박석으로 되어 있는데, 박석 은 널찍하고 얇게 펴서 바닥에 깐 돌로 난반사로 인해 눈이 부시지 않고 비가 와도 질척이지 않는다.
1904년 함녕전에서 불이 났다. 함녕전은 고종의 침전으로 온돌을 수리하다가 화재가 발생하여, 4월 초 서풍을 타고 함녕전, 즉조당, 석어당, 중화전으로 옮겨 붙어 전각 모두가 소실된다.
현재의 중화전은 1906년도에 다시 복구된 것이다.
중명전 ( 重明殿 )
중명전은 1901년에 지어진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이다. 처음에는 황실 도서관으로 쓰이다가 1904년 덕수궁 화재 후 고종의 편전, 외국 사절 접견실로 사용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또한 기울어가는 대한제국을 살리고자 고종이 헤이그 ( 만국평화회의 )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한 곳이기도 한다.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의 자주 문명국가임을 천명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다. 5년 동안의 복원 공사 후 2014년 10월 대한제국 역사관 석조전으로 재탄생한다. 그러나 국권상실로 인해 재 역할을 하지 못한다. 황제를 폐현하는 접견실에는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고 오얏꽃 문양은 대한제국의 황실을 상징하는 것이다.
※ 폐현 ㅡ》황제를 접견하는 것.
알현 ㅡ》왕을 접견하는 것.
2층으로 향하는 철제 난간은 110년 전의 것 그대로이고, 황제의 침실이 있으며, 서제와 황후의 침실이 있다.
당시 덕수궁에는 러시아 영사관, 미국영사관, 영국영사관이 곳곳에 있었다.
함녕전 ( 咸寧殿 ) 모두가 편안한 건물
현재 함녕전의 정문인 광명문을 복원하였고,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된 함녕전은 1897년 지어져 정면 9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1904년 4월 화재로 그해 12월에 중건했다.
함녕전은 건물 중앙 좌우에 온돌방을 만들어 놓은 침전 ( 寢殿 )이다. 고종이 승하한 장소이기도 하다.
함녕전은 고종의 거처이었으며, 승하를 하시고, 광명문을 통해 상여가 출발을 하고, 대한문에서는 3.1 운동으로 이어진 곳이다.
돈덕전 ( 惇德殿 )
함녕전 뒤편에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던 서양식 건물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돈덕전 ( 惇德殿 )이다. 지금은 복원공사 중이지만 순종이 즉위한 곳이기도 한다. 마지막 황제 순종이 즉위한 곳인 돈덕전은 연회장, 귀빈 응대 장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이러한 덕수궁은 제한제국의 선포와 자주문명국가임을 천명한 곳으로 대한제국의 상징이 되었으나 끝내 실현되지 못한 대한제국의 꿈으로 남아 있다. 근대사와 같이 한 궁궐 덕수궁 우리의 아픈 역사임을 잘 새겨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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